음악가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같은 음표를 연주하더라도, 어떤 음악가는 음 하나하나를 짧고 날카롭게 끊어내고(스타카토), 또 어떤 음악가는 음과 음 사이를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 붙입니다(레가토).
이렇게 음을 어떻게 연주하고 표현하느냐를 음악에서는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티큘레이션이 없다면 모든 연주는 밋밋하고 감동 없는 소음이 될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안젤라 휴이트'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연주를 1998년과 2015년, 두 번 녹음을 했는데요. 그 두 음반을 비교 청취하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아티큘레이션의 변화였습니다.
사실, 그 변화라는 것이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결과물은 결코 작지 않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연주하는 사람의 섬세한 변화조차도 느끼는 음악 애호가 제 자신이 신기하다 느꼈던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 '아티큘레이션'의 개념을 확장해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리고 특히 정치라는 복잡한 영역에서도 '아티큘레이션'을 적용해 본다면 참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 서로 다른 주장, 복잡한 사회 문제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능한 정치인이나 정당은 흩어진 음표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되듯, 이 모든 흩어진 목소리들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엮어내는 '정치적 아티큘레이션'의 기술을 발휘하겠죠.
정치의 아티큘레이션은 단순히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요소들을 '연결'하고 '명확한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는 주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 높은 교육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는 청년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각각 다르지만, 정치인이나 정당은 이러한 개별적인 고통을 '불평등'이라는 더 큰 틀 안에서 '연결'하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흩어져 있던 불만들이 '불평등 해소'라는 하나의 아티큘레이션 아래 뭉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치의 아티큘레이션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사회 문제나 개인의 요구를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특정 이념이나 가치 아래 의미 있게 묶어냅니다. 마치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풀어서 한 줄로 꿰는 것과 같습니다.
특정 주장이 사회 전체에 '당연하고 옳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도록 만듭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살아야 모두가 잘 산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것도 일종의 아티큘레이션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통하면, 특정 세력은 그만큼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공감을 이끌어내어 행동하게 만듭니다.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아티큘레이션은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됩니다.
정치에서 아티큘레이션은 단순히 '말 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이해하고, 이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엮어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복잡하고도 중요한 과정입니다.
결국, 새 정부의 성패는 '흩어진 정치,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국민이 공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명확한 아티큘레이션을 제시할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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