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군사 충돌로 국제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국내 정유사와 대형 대리점이 잇따라 유류 공급가격을 올린 것과 관련해 “국가적 비상 상황을 틈탄 폭리”라는 비판이 국회에서 제기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허성무 의원은 9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정부가 유류세 인하 연장 등 세수 감소까지 감내하며 서민 물가와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중동 위기를 틈타 공급 단계에서 가격을 급격히 인상하는 것은 국민경제 측면에서 책임 있는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허 의원은 이날 정유사와 대형 대리점이 일선 주유소에 보낸 유류 공급가격 인상 문자 통보 사례도 공개했다.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SK에너지는 지난 3월 3일 주유소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9일부터 휘발유 117원, 등유 241원, 경유 221원을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하루 뒤 다시 문자를 보내 휘발유 179원, 등유 375원, 경유 324원 인상으로 조정했고, 3월 5일에는 휘발유 210원, 등유 1017원, 경유 445원 인상으로 변경됐다. 이어 3월 9일 오전 다시 가격이 조정되면서 공급가격 인상 통보가 연속적으로 이뤄졌다고 허 의원은 설명했다.
대형 대리점인 대양석유 역시 지난 3월 7일 주유소에 휘발유 249원, 등유 801원, 경유 479원 인상 계획을 문자로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허 의원은 특히 등유 가격 인상 폭을 문제 삼았다. 그는 “등유는 서민 난방과 농민의 온실·비닐하우스 농업에 쓰이는 대표적인 민생 연료인데 불과 보름 사이 1400원 넘는 인상 통보가 이어졌다”며 “문자 한 통으로 등유 가격을 1000원 이상 올리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허 의원은 “전국에 1만 개가 넘는 주유소가 경쟁하는 구조에서 주유소 담합을 통한 폭리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가격 상승의 출발점은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공급가격을 통보하는 정유사와 대형 대리점의 가격 결정 구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유소 단속보다 공급 단계의 가격 결정 구조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며 “정부가 정유 4사와 협의해 비축유 활용과 유가 안정 대책을 포함한 종합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허 의원은 국내 유류가격의 국제가격 연동 구조도 문제로 제기했다. 그는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아시아 석유제품 시장의 기준가격인 싱가포르 제품가격(MOPS)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구조가 있다”며 “실제 판매되는 제품이 과거 도입된 원유와 기존 재고를 바탕으로 생산된 경우가 많음에도 국제 가격 변동이 국내 가격에 빠르게 반영되는 반면, 하락은 상대적으로 늦게 반영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해외 사례도 언급했다. 허 의원은 “오스트리아와 호주 등 일부 국가는 가격 인상 횟수를 제한하거나 일정 기간 가격을 고정하는 ‘가격 변동 규칙’을 통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있다”며 “우리도 석유제품 가격 체계를 보다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LPG처럼 월 단위 가격 고시 체계를 참고해 석유제품 공급가격 변동 주기를 관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허 의원은 석유사업법 제23조를 근거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그는 “석유사업법은 가격 급등 시 정부가 최고가격 지정이나 가격 인상 제한 등 가격 안정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공급가격 결정 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시장 안정 장치를 강화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질의에서는 원유 수송을 둘러싼 에너지 안보 문제도 제기됐다. 허 의원은 “원유 확보만큼 중요한 것이 원유 수송 능력”이라며 “우리나라 원유 수송에서 국적선 비중과 위기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수송 능력을 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허 의원은 “이번 사태는 단순한 유가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민생 물가가 동시에 걸린 문제”라며 “정부가 정유사 공급가격 구조와 원유 수송 체계를 포함한 종합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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