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태평양 전쟁 기념곡까지, 일본식 클래식 소비가 관례?
매년 12월, 대한민국 주요 공연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으로 도배된다. 베토벤이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인 '환희의 송가'가 어느덧 한국에서는 '이 곡을 들어야 한 해가 간다'는 관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화려한 무대 뒤에는 제국주의의 잔재와 일본식 클래식 수용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과거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는 일본의 유별난 베토벤 9번 열풍을 취재하며 이를 기이한 문화 현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일본에서는 12월 한 달간 전국 어디에선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합창'이 연주된다.
아마추어부터 전문가까지 일 년 내내 이 곡을 연습하고, 체육관에 1만 명의 시민이 모여 '환희의 송가'를 떼창하는 모습은 예술적 열정을 넘어 일종의 집단주의적 광기를 연상시킨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 12월 도쿄에서만 21회의 공연이 열렸고, 특정 홀에서만 7회 이상 연주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다이쿠(第九)' 문화는 제국주의 시절에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칭다오를 점령한 일본군이 독일군 포로 4,700여 명을 수용하며 그들로부터 이 곡을 처음 접한 것이 시초다(현재 도쿠시마 현과 독일 니더작센주의 자매결연 토대이기도 하다).
이후 나치 독일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베토벤과 바그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이 곡의 운명은 뒤틀렸다.
1942년 4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휘했던 베토벤 9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면서도 수치스러운 연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 이후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은 이 곡의 연주를 꺼리기도 했으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1942년 태평양 전쟁 개전 1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이 곡을 군가처럼 연주하며 국가적 단결의 도구로 삼았던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대한민국 클래식계가 이러한 일본의 '기획된 전통'을 무 비판적으로 복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클래식 수용 과정은 일본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했다.
소달구지를 끌던 시절 이미 비행기를 만들고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던 일본의 위세에 눌려, 우리 선배 세대들은 일본의 음악적 취향을 곧 '선진적인 것'으로 오해했다.
당시 국내 음악계는 일본의 음악 잡지 '계간음악' 등을 탐독하며 일본 평론가들의 문장을 그대로 베끼기 바뻤던 시절도 있었다.
푸르트벵글러나 칼 뵘 같은 독일 정통파의 육중한 템포만이 정답인 양 설파되었고, 일본 음반 산업이 '잽머니'를 동원해 만들어낸 상업적 관습은 어느덧 한국에서 '세련된 전통'으로 둔갑했다.
현재 한국 오케스트라들이 12월이면 '합창'을 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상은 사실상 무비판적 복제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12월에 베토벤 9번을 듣는 이유가 진정한 예술적 감동 때문인가, 아니면 식민지와 개발 시대를 거치며 내면화된 일본식 관습에 대한 무지한 추종 때문인가.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독자적이고 건강한 연말 음악 문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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